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는 좋아하지만, 생각을 해야 하는 영화는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를 보고 나면 일상을 살다가도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그렇게 문득 이야기가 다가올 때 얻을 수 있는 감상이 좋다. 스토리 흐름을 따라가며 느끼는 것이 좋지 상징과 함축이 많아서 머리를 써야하는 영화는 즐기지 못하겠다. 「어웨이 프롬 허」는 그런 의미에서 좋았다. 노년의 삶이 주인공인 만큼 흐르듯 이어지는 이야기가 잔잔히 다가왔다.
긴 백발 머리에 무채색을 즐겨 입는, 소복한 눈에 감춰진 집과 다락같은 공간에서 남편과 마주 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노년의 피오나. 우아하고 사려 깊으며 따뜻하다. 18세에 만나서 44년의 결혼 생활을 했다고 하니 60대 초반 정도 되었을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로 인해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 피오나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 그랜트. 피오나는 기억을 잃음과 동시에 품위를 함께 잃는다 느껴 스스로 요양원에 가겠다고 한다. 44년 동안 살을 맞대며 사는 가족이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생기 넘치는 아름다운 모습만을 남기고 싶었을 터. 그렇게 피오나는 요양원으로 떠나고, 한 달간은 면회가 금지되어 남편을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후에 수선화를 들고 찾아온 남편은 요양원에서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은 채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시작한 피오나를 마주한다.
남편 그랜트가 아내 피오나를 표현하는 말… 번역자에 따라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토요명화의 자막에서는 이렇게 표현된다.
‘직설적이면서도 모호하고
달콤하면서도 모순적이다‘
노년의 남편이 아내에게 이런 감미로운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면서 40년 넘게 친구, 연인, 부부로 지내야지만 나올 수 있는, 한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후에야 가능한 표현인 것 같다. 죽음이 슬픈 것은 영원히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신을 살아있지만, 기억이 죽어버렸을 때. 보고 느낄 수 있더라도 상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우리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을 때. 내가 잊혀지고 있는 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채워지는 모습을 마주할 때. 그랜트에게는 44년이라는 과거의 추억과 남은 평생을 함께 보낼 것이라 믿어왔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지만, 피오나에겐 오직 현재 뿐이다. 과거와 미래를 붙잡고 있는 그랜트에게 눈 앞의 피오나는 절망이지만, 현재를 살고 있는 피오나에게 그런 그랜트는 부담스럽고 혼란스럽다.
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에 대한 한줄 평으로 ‘사랑에서 추억을 제하면 무엇이 남을까’ 라는 말을 했다. 관계에서 ‘기억’이 갖는 힘은 생각보다 세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이별이 슬프지 않게 될까. 영화를 보는 내내 대체 저 ‘기억’이 무엇이길래 그랜트는 자신을 철저히 남으로 대하는 피오나를 매일 찾아가고 지켜볼 수 있을지 생각했다. 알츠하이머는 뇌의 회로가 막히고 차단되는 병이라고 한다. 너무나 아프고 괴로운 일이다. 그런데 얼핏 이런 생각도 들었다. 기억의 꼬리를 잡고 과거와 미래를 놓지 못해 괴로워하는 그랜트보다 모든 시간에서 단절된 채 현재만을 살고 있는 피오나가 더 행복하지 않을까.
요즘은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이별이 담담하고 이별 후의 극복이 빨라지는 것은 영원한 사랑이 없으며, 삶에서 한 사람만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실은 그 반대일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은 사랑이 영원하다고 믿지만, 이별했다고 해서 내 삶에 더 이상 사랑이 없다 생각하면 너무나 아프고 괴로우니 애써 사랑이 아니었다고, 다른 사랑이 있을거라고 자위하는 것 같다. 또 찾아올 것이라 여겨야지만 경쟁적이고 바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에 애써 그렇게 나를 다독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사람들이 관계를 가볍게 여긴다고 하거나 인스턴트 사랑을 한다는 말을 들으면 씁쓸하기 보다는 애처롭다. 너무나 상처 받을 일이 많은 세상이니 하루 빨리 상처를 극복하고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아둥거리는 모습이 느껴져 애처롭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을 잃음에 담담한 사람은 없다. 피오나처럼 기억이 서서히 페이드아웃 되지 않는 이상. 아니, 피오나도 그랜트를 마주하면 혼란스럽고 괴로워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사랑을 시작하고, 동시에 기억을 잃는다면 모를까. 하기야 사람을 잃던 기억을 잃던 잃는다는 건 정말 아픈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 속 피오나처럼, 그랜트처럼 사랑하고 싶고 그렇게 늙고 싶다. 순간을 살며 감정을 느끼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은 의욕적이다. 백발이 되어서도 마음 안에 품어온 희망을 말하고, 가지 못한 장소를 상상하고, 사랑에 아파하고 애틋해 하는 모습으로 언제까지나 생기있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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