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본 것들

남아 있는 나날/ 1993

잠늘보 2016. 4. 24. 00:46



  페이스 북 EBS story 페이지에서 토요 명화로 방송이 된다는 소식을 읽고는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영국인들의 전통과 예절, 품위를 엿볼 수 있답니다’ 라는 문구에 한 번, 안소니 홉킨스에 또 한 번의 확신을 얻고. ^^


  안소니 홉킨슨이 연기한 스티븐스는 영국 달링턴 홀에서 일하는 유능한 집사다. 노인이 된 스티븐스가 달링턴 경을 위해 희생해온 지날 날과 스스로 가졌던 집사로서의 체면과 숭고함, 사명감을 회고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30년대의 유럽은 이념과 인종의 차이로 인한 전쟁이 계속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영국 귀족인 달링턴 경은 각 국의 인사들과 회담을 하며 독일과의 화합 관계를 맺고자 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달링턴이 국제 정세의 중심에 서 있던 때부터 나치스트로 몰려서 파멸할 때까지 스티븐스는 그를 충성스럽게 모신다.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전통에 갇힌 유럽인을 비난하는 미국 정치인의 연설, 달링턴의 대자로 나온 휴 그랜트가 스티븐스에게 대부님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알았냐고 묻는 장면 등… 당시의 긴장감 있는 사회적 배경을 점잖고 절제된 가운데 표현한 장면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스티븐스에게는 집사로서의 삶이 전부였다. 노년의 스티븐스가 휴가를 맞아 달링턴 홀을 잠시 떠나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은 달링턴을 평화를 깨트린 파시스트로 비난하고, 집사로 평생을 살아온 스티븐스를 ‘하인’이라 표현한다. 평생을 믿어온 자신의 세계가 깨진 사람의 감정을 안소니 홉킨슨의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서서히 무너지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나' 하는 자조 섞인 질문을 던지는 듯한 허망함. 스티븐스는 달링턴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진정한 신사였으며 너무나 순수해서 세상에 이용당했던 거라고 말한다. 정말 그랬다. 달링턴은 대자의 부부 관계를 걱정하며 도움을 청할 만큼 순수했고, 유대인 하녀를 독일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해고했으나 이내 실수를 인정하고 그들을 찾을 정도로 인간적이었다. 그러나 냉정한 역사의 평가 앞에 그의 명예는 끝없이 추락했다. 흔히 ‘순수한 건지 멍청한 것인지 모르겠다’ 라는 말을 한다. 그가 아무리 바른 인격과 성품을 지녔다 해도 그의 권위에서 오는 책임을 따르지 못한 대가로 그의 파멸은 잔인하지만 예정된 것이었다.


  달링턴의 방향이 그릇되었음을 감지하고 있었으나 주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 집사의 덕목이라 생각한 스티븐스. 그는 젊음을 달링턴에게 충성하느라 가족과 연인을 잃었다. 노년이 되어 자신의 삶을 멀찌감치 놓고 볼 수 있게 되어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그. 되돌리고 싶지만 어떻게 되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삶의 우선순위를 잃은 채 살아온 사람은 그렇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 뿐이라고 생각하며 살 때, 그것이 정말 절대적으로 가치 있는 것이라면 미덕이겠으나 행여 그것이 맹목적인 태도였다면…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순위를 바꿨어야 했던 것을 시간이 너무나 많이 흐른 후에 깨닫게 되었을 때의 상실감… 내가 살면서 가장 경계하고 싶은 부분이다. 부디 사는 중에 언제라도 내 삶이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 되돌릴 수 있는 용기가 내게 있기를 바란다.


(2013. 1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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